[시승기] 페라리 812 슈퍼패스트 “마지막 로망”
  • 김상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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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8.10.23 15:07
[시승기] 페라리 812 슈퍼패스트 “마지막 로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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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건 없다. 홍조 띤 단풍은 손바닥을 흔들며 땅에 떨어져 흙으로 돌아가고, 사막처럼 뜨겁던 여인의 사랑도 바람에 날려 흩어진다. 찬란했던 페라리의 12기통도 시대의 요구에 가로 막혀 저물어가고 있다. 그래서 812 슈퍼패스트를 시승하는 것이 마냥 즐겁지만은 않았다. 이별은 계절이 바뀌듯 예고도 없이 찾아온다.

엔초 페라리는 12기통을 사랑했고, 집착했다. 그가 가장 사랑했던 그의 아들 ‘알프레도 페라리’도 그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엔초는 12기통이 아닌 차를 페라리라 부르지 않았다. 알프레도가 요절한 후에도, 엔초는 그를 기리는 스포츠카에 페라리 엠블럼을 붙이지 않았다. 그저 “페라리와 가장 가까운 차”라고 말할 뿐이었다.

훗날 그의 고집도 결국 꺾였지만, 여전히 페라리는 12기통에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엔진의 형태나 위치가 달라진 경우는 있었지만 페라리 최고의 모델은 늘 12기통이었다. 812 슈퍼패스트는 그 계보를 잇는다. 터보 차저나 전기모터, 사륜구동의 도움없이, 순수한 12기통 자연흡기 엔진의 힘이 오로지 뒷바퀴에 쏟아진다.

마초적이란 표현으로 부족하다. 이건 미친 거다. 스포츠카의 순수함을 지키기 위한 페라리의 삐뚫어진 사랑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상상하기도 힘든 800마력의 후륜구동 프론트 미드십 슈퍼카는 설렘보다 두려움이 앞선다. 폭발적인 12기통의 떨림은 운전대를 잡은 손에서 가슴까지 이어진다. 동공은 커지고, 쿵쾅거림이 잦아들지 않는다. 페라리에 처음 앉았던 날이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812 슈퍼패스트는 강렬하다.

바람이 깎아놓은 날카로운 얼굴과 늘씬한 몸매는 남몰래 흠모하는 여인을 떠올리게 한다. 매력적이지만 치명적인. 인상이 강해서 사납게 보이지만, 알고보면 친절과 배려가 숨어있다. 멋을 위해 허세를 부린 곳은 하나도 없다. 전혀 기능적으로 보이지 않지만, 페라리가 수십년 동안 F1을 통해 갈고 닦은 기술력이 집약됐다.

남들은 거대한 스포일러나 눈에 쉽게 보이는 치장에 바쁘지만, 페라리는 그저 유려하고 매끈하게 만든다. 핵심 포인트는 몰래한 사랑처럼 꼭꼭 숨겨놓았다. 입을 크게 벌린 그릴 속에는 여러 갈래 통로가 있다. 가장 큰 가운데 구멍은 엔진에 숨을 불어넣는다. 양쪽의 작은 구멍은 브레이크를 식힌다. 차체 밑바닥으로 빠져나가는 바람은 저항을 줄이거나 다운포스를 높인다. 양쪽 끝에는 ‘에어 플랩’이 적용됐고, 속도에 따라 열리고 닫히길 반복한다.

어깨에서 척추를 따라 허리까지 부드럽게 이어진 굴곡. 812 슈퍼패스트는 탄탄하고 섹시한 실루엣을 가지고 있다. 윈드터널에서 거센 바람 맞으며 812 슈퍼패스트는 의연하게 몸을 키웠다. 바람은 골짜기처럼 패인 상처와 봉긋 솟은 엉덩이를 꾹꾹 누르며 자세를 고쳐 잡아준다. 디퓨저는 스포일러처럼 넓게 퍼졌고, 그 아래에도 속도에 따라 열리고 닫히는 에어 플랩이 적용됐다. 812 슈퍼패스트는 바람을 가지고 논다.

그래서 더 조용하고 안정적이다. 바람은 차에 부딪혀도 깨지지 않고 흐른다. 나무 줄기가 요동치는 상황에서도 812 슈퍼패스트는 흔들림이 없다. 쭉 뻗은 길을 빠르게 달릴 땐 두려움도 잊는다. 웅웅거리는 조금의 두근거림만 어렴풋이 전달된다. 때론 서로를 꼭 껴안은 커플처럼 평온하다. ‘범피(Bumpy) 모드’는 이 연인 앞에 놓인 여러 난관을 슬며시 해결해준다. 페라리가 늘 공포의 대상인 건 아니다. 빠르게 잘 달리도록 정교하게 만들어진 차는 역설적으로 천천히 달릴 때도 편안하다.

페라리의 욕심은 끝이 없다. 가진 것에 만족하지 않는다. 계속해서 성능을 높이고, 전자장비를 업그레이드 한다. 수십년간 계속된 갈증이 812 슈퍼패스트와 같은 괴물을 만들었다. 12기통 자연흡기 엔진 시대의 마지막을 장식하기라도 하듯, 페라리는 상징적으로 최고출력을 800마력까지 높였다. F12 베를리네타에 비해 60마력 높아졌고, 특별 모델인 F12 tdf보다 30마력 더 강하다. 배기량도 람보르기니 아벤타도르와 같은 6.5리터로 맞췄다. 그동안 자존심이 상한 거고, 본 때를 보여준 거다.

상상도 잘 안가지만 800억원이 있어도, 언제나 돈을 뿌리고 다니진 않을 거다. 낭비와 풍요로움의 차이. 812 슈퍼패스트는 여유로움을 달고 달린다. 누군가의 도발도 웃어넘긴다. 엄지발가락을 살짝 굽히는 것만으로도 우리나라 도로의 한계속도에 다다르고, 스티어링휠의 빨간 LED가 몇개 점등된 것 만으로도 디지털 속도계의 맨 앞자리가 휙휙 바뀐다. 여유롭고 평화롭지만, 언제나 주머니의 꽉 진 주먹을 꺼내 순식간에 상대방을 날릴 준비는 되어 있다.

적요로운 산길에서 812 슈퍼패스트는 서럽게 운다. 그 울음은 순수해서 슬프기보다 아름답다. 날카롭지만 서정적인 아리아가 시작되면 지저귀던 새도, 나무를 흔들던 바람도 조용히 입을 다문다. 은행의 두 갈래만 소리없는 박수를 보낸다. 9000rpm 가까이 회전이 치솟으면 당장 파국으로 치닫을 것만 같다. 슬픔은 때때로 원망과 분노로 바뀌기도 한다.

휘청. 엉덩이가 소스라친다. 흥분한 812 슈퍼패스트는 종잡기 힘들다. 뒷바퀴는 혼자 성을 내며, 제 스스로 갈길을 찾아 나서려 한다. 800마력, 73.3kg.m의 힘은 생각보다 더 강력하다. 괜한 시승을 했나 싶다. 변속을 거듭할 때마다 힘을 주체하지 못하고 뒷바퀴가 미끄러진다. 그래도 놀랍도록 빠르다. 약간의 멈칫도 한계에 다가가려는 일련의 과정으로만 느껴진다.

812 슈퍼패스트는 쿵짝을 잘 맞춘다. ‘아’ 하면 ‘어’ 한다. 내가 어떤 것을 잘하는지 어떤 면이 부족한지 훤히 꿰뚫고 있다. 거짓말을 할 필요가 없다. 종종 차체를 흔들며 잔소리하지만, 오구오구 토닥이는 엄마처럼 이해하고 감싸준다. 그래서 두렵지만 산길을 연신 달릴 수 있다.

얼굴이 보통 두껍지 않은 이상 내가 잘났소 말하기 힘들다. 812 슈퍼패스트는 실시간으로 운전자와 스스로의 상태를 확인한다. 뒷바퀴가 헛도는 회전수를 계측하고, 차량의 하중 이동, 운전자의 평소 스타일 등을 종합적으로 계산한다. 또 페라리 최초의 전자식 파워 스티어링을 장착한 모델답게 그것에 대한 측정과 판단이 빠르고, 이를 기반으로 뒷바퀴의 각도까지 꺾어준다. 거대한 812 슈퍼패스트를 수족처럼 다룬 건, 나 스스로만의 능력은 분명 아니다.

페라리는 이제 12기통 자연흡기 엔진만을 내놓지 않겠다고 했다. 페라리도 시대의 흐름에 무릎을 꿇었다. 전기모터가 달리거나, 엔진은 작아질 거다. 그리고 인위적인 터보 차저가 놓일 거다. 그런데 모든 것이 영원하지 않다면, 우리에게서 떠나간 그 무엇이 언젠가 다시 돌아올 수도 있는 거다. 그 기다림의 끝이 언제가 될 지는 모르지만, 페라리라면 12기통 자연흡기를 영원히 묻어두지 않을 거다. 그리고 먼훗날 누군가 우리에게 페라리의 순수했던 12기통은 어땠지라고 물으면, 812 슈퍼패스트를 가장 먼저 떠올릴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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