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승기] 포르쉐 911…911의 창과 방패
  • 스페인 발렌시아=김상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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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9.04.11 16:17
[시승기] 포르쉐 911…911의 창과 방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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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기는 어느새 지중해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몸이 아파 한숨도 못 잤다. 의사는 몇번이나 단호하게 괜찮다고 말했지만, 지난주 도려낸 맹장 때문에 오른쪽 아랫배가 아렸다. 의사들은 대개 최악의 상황을 말하거나, 그 반대로 얘기한다. 중간이 없다. 자동차 브랜드의 커뮤니케이션도 이런 식이다. 조금 다르다면 언제나 거창한 명분으로 시작해 끝없는 자랑으로 끝난다. 중간과 끝이 없다. 그래서 합리적인 의심과 적당히 귓등으로 흘려듣는 능력이 필요하다.

그런데 가끔, 뻔히 자랑이나 과장인 줄 알면서도 혹할 때가 있다. 포르쉐가 그랬다. 덩치 큰 카이엔을 앞에 두고 우리는 스포츠카를 만든다고 당당하게 말하는데 왠지 모를 믿음이 갔다. 카이엔을 눈 앞에 두고도 911이 떠올랐으니깐. 80여년 동안 포르쉐는 우리들에게 늘 놀라움을 안겨줬고, 그 중심에는 늘 911이 있었다. 그런데 막상 포르쉐는 911을 두고는 요란스럽게 굴지 않았다. 담백하게 요점만 콕콕 집었다. 911의 진화가 마케팅이나 홍보로 희석되는 것을 싫어하는 듯 했다.

지역 신문 일면에는 이강인 선수의 얼굴이 있었고, 미세먼지 없는 하늘은 너무나 파랬다. 도로에는 노란 오렌지가 매달린 나무가 가득했다. 발렌시아는 맑고, 따뜻하고, 상쾌했다. 지중해와 맞닿은 발렌시아는 카탈루냐의 열정적인 삶도 가득했다. 도심에서 벗어난 리카르도 토르모 서킷에서는 매년 모토GP가 열리고, 발렌시아 외곽에만 해도 속도를 즐길 수 있는 프라이빗 서킷이 가득했다.

포르쉐는 리카르도 토르모를 통째로 빌렸고, 슈투트가르트에서 공수한 클래식 911들과 992란 코드네임을 가진 형형색색의 신형 911을 준비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호사스러운 출장이었다. 스페인 남부의 강한 햇볕은 신형 911의 새로운 음영을 더 선명하게 만들었다. 일렬로 늘어선 여덟대의 911은 여전히 서로를 닮은 구석이 많았다. 서킷을 달리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지만, 어쨌든 신형 911을 하루 종일 타는 일정이었다. 포르쉐는 보여줄게 많았다.

첫 세션부터 서킷 주행이었다. 통성명도 하기 전에 알몸부터 확인하게 됐다. 운전대 왼편에 놓인 시동레버를 돌리는 것은 50여년 동안 달라지지 않았다. 시동이 걸리는 순간 911이 내뱉는 소리와 엉덩이에서부터 느껴지는 떨림이 전달하는 메시지도 달라진 게 없었다.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매섭게 서킷을 달리는 것도 같았다. 다만 신형 911은 더 빠르고 날카롭게 서킷을 돌았고, 비현실적으로 안정적이었다. 포르쉐라서, 911이기 때문에 가능한 변화였다. 도드라진 원형 헤드램프는 공기역학을 위해 조금씩 드러누웠다. 물방울처럼 몽글몽글한 실루엣은 더 길쭉해졌고 널찍해졌다. 디자인의 변화는 눈요기에만 그치지는 것은 아니었다.

속도를 높이기 위해서 포르쉐는 2세대로 진화한 수평대향 6기통 터보 엔진의 출력을 30마력 높였다. 흡기 시스템을 완전히 새롭게 설계했고, 터빈의 크기도 키웠다. 개선된 터빈 하우징을 이용해 공기 흐름도 개선했다. 냉각 성능도 향상됐고, 피에조 인젝터를 이용해 분사 시스템도 정밀해졌다. 힘이 세진 만큼 트랙션을 더 확보해야 했다. 좌우 앞바퀴의 간격은 45mm, 뒷바퀴의 간격은 44mm 넓어졌다. 타이어도 앞에는 20인치, 뒤에는 21인치를 적용했다. 뒷바퀴 타이어의 면적은 315mm에 달한다. 브레이크 디스크도 더 커졌다. 한가지 목표를 위해 보이는 곳, 보이지 않는 곳을 전부 새롭게 했다. 마치 시즌 규정이 달라질 때마다 레이스카를 업그레이드하는 모터스포츠팀처럼 철저하게 911을 바꿨다.

신형 911 카레라 4S의 회전계의 바늘은 사납게 돌았다. 붉은 아날로그 바늘은 3시와 1시를 바삐 움직였다. 디지털 클러스터의 그래픽이라면 이 현란한 동작을 따라오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8단 PDK 변속기는 더 강력해진 엔진의 힘을 물샐틈없이 다뤘다. 전자식 기어 레버가 적용되면서, 임의적인 변속은 패들시프트로만 한다. 손맛이 조금 그립긴 했지만, PDK 변속기는 손보다 빨랐다. 내가 서킷을 달리고 있는지 도심을 천천히 거닐고 있는지 PDK 변속기는 전부 헤아리는 듯 했다.

911이 코너에서 크게 기울지 않기 시작한 것은 꽤 오래 전부터였고, 신형 911은 한계 시점이 더 느즈막히 찾아왔다. 911은 더 빨라지고 있지만, 운전은 더 쉬워지고 있다. 트랙션 향상을 위해 포르쉐는 보이지 않는 여러 부분을 고쳤다. 차에서 가장 무거운 엔진을 지지하는 액티브 엔진 마운트가 차체 중앙 쪽으로 이동했다. 포르쉐 액티브 서스펜션 매니지먼트(PASM)는 더 징밀해졌고, 뒷바퀴의 조향까지 뒷받침되는 상황이 됐다. 신형 911은 GTS 수준으로 ‘제로백’만 빨라진 게 아니라, 모든 면에서 더 정교하고 공격적으로 달리는 차가 됐다.

복강경 수술 부위를 덮은 밴드가 아직 떨어지지 않은 시점에서 911 카레라 4S은 내 오장육부를 흔들어 놓았다. 인스트럭터가 모는 911 GT3 RS는 조금씩 엉덩이를 흔들며 더 거세게 달리자고 부추겼다. 리카르도 토르모는 각이 큰 코너가 연속돼 있지만 신형 911 카레라 4S는 GT3 RS에게 거리를 허용하지 않았다. 오히려 코너에서 더 맹렬하게 거리를 좁혔다. 창으로 GT3 RS의 엉덩이를 콕콕 찔렀다. 이전 세대보다 더 많은 토크를 앞바퀴에 보내고, 뒷바퀴의 각도가 조절되는 액티브 리어 스티어링이 적용되면서 최고속도를 낼 수 있는 레코드 라인이 더 짧아졌다. 스티어링 조작에 따른 차체의 움직임이 훨씬 기민해지면서 더 직선에 가까운 라인을 만들 수 있게 됐다.

수많은 스포츠카가 ‘타도 911’를 외치며, 스스로를 911의 경쟁자라고 말하지만 포르쉐는 그 누구도 경쟁자로 언급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연’을 경쟁자로 지목했다. 달리기에 최적화된 여름용 타이어를 신고 있는 911의 가장 큰 적은 어쩌면 여름철 장마가 아닐까. 그래서 포르쉐는 앞바퀴 휠하우스 안쪽에 음파 센서를 달아놓았다. 센서가 젖은 노면을 감지하고 웻모드가 작동하게 되면 911에 탑재된 수많은 섀시 시스템이 응답하게 된다.

수십개의 스프링쿨러는 메마른 카트 트랙을 촉촉하게 적셨다. 순간적인 힘이 뒷바퀴에 실릴 땐 아찔할 정도로 휘릭 엉덩이가 돌았다. 스포츠 플러스 모드에서는 가속페달을 밟을 때마다 트랙을 벗어날 정도로 차가 들썩였다. 웻모드는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신기했다. 내가 직접 몰고 있으면서도 어리둥절했다. 리어 스포일러는 방패처럼 솟아나며 다운포스를 높이고, 포르쉐 토크 벡터링 플러스, 포르쉐 스태빌리티 매니지먼트, 포르쉐 트랙션 매니지먼트 등의 전자장비가 여러 센서와 함께 어우러져서 차의 자세가 불안정해지는 것을 미리 막아버린다. 불안정한 자세를 뒤늦게 잡아주는 흔한 제어 시스템과는 명백하게 달랐다. 포르쉐가 생각하는 안전의 개념은 단순히 사고를 막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안전이 확보된 상태에서 최고속도를 낼 수 있게 끔 만드는 것이었다. 기술은 복잡하지만 의도는 순수했다.

911은 모순적이다. 지독하게 과학적이면서도 이론적으로 설명하기 힘들다. 선대를 존중하면서도 그들을 훌쩍 뛰어넘어 버리고, 언제나 새로움을 주면서도 변하지 않는다. 아날로그와 디지털이 조화를 이루며, 숨을 못 쉴 정도로 서킷을 달리면서도 소중한 이를 편안하게 집까지 바래다 줄 수 있다. 911은 50여년이 넘은 시간동안 스스로와 싸우며 공존할 수 없는 이런 이중적인 가치를 쌓았다. 992란 코드네임을 지닌 8세대 911은 얄미울 정도로 자신만의 영역을 더 공고히 구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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