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김상영] 메르세데스-벤츠의 사랑…니스 디자인 센터를 가다
  • 니스=김상영
  • 좋아요 0
  • 승인 2019.11.08 09:00
[주간김상영] 메르세데스-벤츠의 사랑…니스 디자인 센터를 가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샤갈은 사랑을 잃고, 프랑스 남부에 정착했다. 유난히 파란 바다가 있고, 작은 언덕만 오르면 어디에서든 그 바다가 보이는 곳에서 샤갈은 수많은 그림을 그렸다. 그의 유난히도 짙은 파랑은 아마 이곳에서 왔으리라. 그가 사랑하는 이와 함께 걸었을 법한 니스의 바다에서 저물어가는 해를 봤다. 바다 건너 멀리 길고 평평한 언덕 위로 해는 천천히 몸을 숨겼다. 마치 오늘이 아쉬웠다는 것처럼 오랫동안 붉은 흔적을 남겼다. 문득 메르세데스-벤츠가 자신들의 디자인을 설명하면서 ‘사랑’을 강조한게 못 마땅하게 느껴졌다. 자본주의의 상징과도 같은 삼각별로 도로를 채우고 있는 메르세데스-벤츠가 사랑 후에 남는 번뇌를 알까.

▲메르세데스-벤츠 비전 EQS

“아직도 메르세데스-벤츠가 디자인을 설명하면서 사랑을 논한 것이 이해가 잘 안 돼요. 사랑은 때론 너무 슬프기도 하잖아요. 실패한 사랑에 대해서도 생각해 봤나요?” 원탁에서 푸른 바다를 보며 두어시간 와인을 마시니 별별 얘기가 다 나왔다. 오전에 비전 EQS의 생김새와 제작 우여곡절을 적극적으로 설명했던 디자이너는 곧바로 질문에 답하지 못했다. 파도 소리는 잔잔했고, 하늘의 붉은 기운은 전부 사라졌다.

프랑크푸르트 모터쇼 일정이 끝난 후 곧바로 프랑스 니스로 향했다. 이미 한국을 떠나온지 일주일이 지난 시점이었다. 높은 건물이 빼곡한 유럽 금융의 중심에서 산과 바다가 펼쳐진 유럽 휴양의 중심으로 이동하는 것은 그나마 위안이었다. 니스는 공기부터 달랐으니깐.

▲메르세데스-벤츠의 니스 어드밴스드 디자인 센터.

공항 주차장에는 뚜껑이 열리는 메르세데스-벤츠가 줄지어 서 있었고, 아무런 고민없이 S클래스 카브리올레에 짐을 실었다. 휴양지에서 기분 내라고 선뜻 차를 준비한 줄 알았는데, 구불구불한 산길을 한참 달렸다. 상상하던 니스의 모습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S560 카브리올레는 힘이 넘쳤지만 정중했다. 그때만 해도 메르세데스-벤츠 디자이너들이 매일 이 길로 출근하는 줄 알았다.

산꼭대기의 마을 구르동. 암벽 위에 세워진 마을은 천년이 넘는 시간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작은 광장에는 마치 마을의 일부인 것처럼 세월의 흔적을 품은 메르세데스가 서 있었다. 메르세데스-심플렉스. 그제서야 험한 산길이 출근길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유럽의 오랜 휴양지가 그러하듯 니스에서는 오래전부터 자동차 경주가 열렸고, 다임러와 벤츠가 경쟁 관계였던 시절부터 다임러는 메르세데스로 니스에서 열린 자동차 경주를 석권했다.

“우리 브랜드의 탄생에 일조한 지역 중 하나가 바로 니스입니다. 우리는 이곳에서 미래를 지향하고 동시에 브랜드의 뿌리를 되새깁니다. 프로방스-알프-코트 다쥐르는 도전정신과 창의력을 불러 일으키죠. 모든 인상주의 화가들은 이곳에서 작품 활동을 했습니다. 영감을 주는 다양한 원천들이 이곳 한 데 어우러져 있어요. 조명, 기술, 예술, 문화, 건축은 물론 주변의 향기마저 다릅니다.” 메르세데스-벤츠의 디자인을 책임지는 고든 바그너는 니스에 디자인 센터를 추가로 설립한 이유에 대해 설명했다. 고든 바그너는 이날 기분이 굉장히 좋았는지, 저녁자리에서 연신 샴페인을 마셨다.

고든 바그너는 2008년 다임러 AG 디자인 총괄에 올랐고, 이듬해 ‘감각적 순수미(Sensual Purity)’라는 새로운 디자인 철학을 창안했다. 그의 디자인 방향성 아래서 메르세데스-벤츠는 우아하면서도 강인하게, 전통적이면서도 혁신적으로 변했다. 판매량도 증가했고, 경쟁 브랜드와의 격차도 커졌다. 그는 이런 상황에 안주하지 않겠다고 했다. “럭셔리는 끊임없는 변화고, 이는 지속가능성을 창출합니다. 이런 변화하는 럭셔리는 메르세데스-벤츠의 핵심이죠.” 이번 디자인 에센셜의 주된 내용은 변화하는 럭셔리였다. 사랑은 그걸 가능하게 만드는 요소였다.

모든 것을 추상적으로 설명하진 않았다. 디자인은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힌다. 디자인 센터의 맨 아랫층에는 비전 EQS의 1:1 모형이 있었다. 디자이너들의 손때가 묻은 클레이 모델이었다. 비전 EQS는 S클래스의 미래를 보여주면서도, 전동화와 자율주행이 주는 변화도 자연스럽게 담겨 있었다.

이미 모터쇼에서 보고 왔지만, 이 차가 만들어진 곳에서 보는 느낌은 또 달랐다. 장인이 눈앞에서 만든 초밥을 직접 접시에 올려주는 느낌이었다. 일렬로 가지런히 놓인 천장 조명은 비전 EQS의 표면을 더 맨들맨들하게 보이게 만들었다. 오사카성과도 바꾸지 않겠다는 고려청자 같았다. 디자이너들은 흰수염고래, 소라, 가오리 등 생물들에게서 모티브를 얻었다고 말했다. “자연을 뛰어넘지는 못하지만 가져올 수는 있죠.” 이 느낌을 해하지 않기 위해 면을 굳이 꼬집어 선을 만들지 않았다. 대신 투톤 컬러의 경계선엔 LED를 심었다. 표면에 반사된 빛과 라이트벨트는 서로서로 연결돼 있었다.

인위적인 것은 더 돋보이게 만들었다. 보닛은 전광판이나 마찬가지였고, 홀로그래픽 모듈이 적용된 디지털 라이트는 화려하게 빛났다. 헤드램프 본연의 임무도 수행하지만 자유롭게 여러 심볼을 보여줬다. 현미경으로 미생물을 보는 것 같았다. “지금까지의 차는 정적이었다면, 디지털화를 통해 살아있는 것 같은 생동감이 생겼습니다. 디지털화를 통해 여러 신호를 보여줄 수 있고, 콘텐츠를 만들 수도 있죠.” 아날로그의 디지털화는 전통을 중요시하는 메르세데스-벤츠의 큰 숙제였다. 자연을 가져오는 것처럼 과거를 가져와 새롭게 만드는 것이 요즘 디자이너들의 큰 고민이다.

익스테리어와 인테리어의 럭셔리는 접근 방식이 조금 다르다. 인테리어는 사용자가 직접 손으로 만지고 느끼면서 럭셔리에 대해 판단할 수 있다. 소재나 마감을 떠나 사용의 편의성도 중요한 부분이다. “인테리어는 향후 10년 동안 큰 변화가 있을 것입니다. 눈으로 보이는 디자인 요소 뿐만 아니라, 사용자들의 인식이 크게 달라질 것입니다. 전체적인 공간에 대한 가치를 높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인테리어 디자이너는 조형미, 편의성, 소재, 인체공학, 장인정신, 디지털 등의 키워드를 강조했다.

비전 EQS의 인테리어는 보트에서 영감을 받았다. 고급스러움과 함께 두둥실 부유하는 여유로움과 부드러움까지 담았다는 얘기다. “밝은 색의 목재와 소재를 사용해서 자연적인 느낌을 강조했습니다. 공중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센터 디스플레이에 공을 많이 들였습니다. 하나의 덩어리처럼 보이게 크롬도 한짝으로 연결했죠. 모든 것을 조화롭게 하기 위해서 원형 송풍구 대신 세로로 긴 에어덕트를 썼는데 이건 앞으로 나올 양산차에도 적용될 예정입니다.” 비전 EQS의 인테리어는 마치 햇빛에 그대로 노출된 것처럼 화사했다. 그리고 깨끗한 느낌이 들었다.

메르세데스-벤츠는 UX 디자인이 미래 자동차 인테리어에서 큰 역할을 담당할 것으로 보고 있다. UX 디자인을 통해 사용자와 자동차의 새로운 감정 관계가 형성될 것이고, 이를 통해 디지털 럭셔리를 강조하겠다는 입장이다. “디지털화를 통해 삼차원 공간이 주는 매력을 더 높이고, 기능 혹은 기술적인 실내 공간을 체험하는 공간으로 만들 생각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용이 쉽고, 간결해야 합니다. 또 더 지능적인 차를 만들어야겠죠. 앞으로의 실내 공간은 명령이 아닌 상호관계가 이뤄지는 곳이 될 겁니다.”

▲디자이너가 아무런 제약없이 차를 만들면, 이런 차가 나온다. 선행 디자이너들은 윗선에도 비밀로 하고, 타이푼 프로젝트를 기획했다. 결과물이 나온 후에 윗선에 보고했다고 한다.

올해는 고든 바그너가 감각적 순수미라는 디자인 철학을 꺼내들은지 10년이 되는 해다. 앞으로의 10년은 더 빠르고, 복잡하게 변할 거다. “디자인 철학은 항상 변함없이 남아 있지만 동시에 끊임없이 변화할 것입니다. 또 미래의 럭셔리에 대한 정의 내리기 위해서 우리는 감각적 순수미를 한 차원 더 끌어올릴 것입니다. 럭셔리에 대한 의미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우리는 다양한 관점을 하나로 통합시키고 감성을 자극하는 매력적인 경험을 창출할 것입니다. 감각적 순수미는 언제나 메르세데스-벤츠의 기본 원칙이자 미학적 혼으로, 이를 위해 계속해서 럭셔리의 개념을 다듬어 갈 것입니다. 지금 메르세데스-벤츠는 세계에서 가장 사랑 받는 럭셔리 브랜드로 전환하는 과정에 있습니다.”

길고 길었던 디자인 세미나는 비전 심플렉스를 공개하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구르동에서 봤던 메르세데스-심플렉스를 니스의 선행 디자인팀이 재해석했다. 건축물을 지으면 조각품을 하나 세워야 하듯, 새로운 디자인 센터 안뜰에 비전 심플렉스를 세워뒀다. 양산과는 거리가 멀지만 과거를 존중하면서 미래를 준비하는 메르세데스-벤츠의 열정이 느껴졌다. 니스의 햇볕은 강렬했고, 모난 곳 하나없는 비전 심플렉스는 그 기운을 사방으로 반사시켰다.

어둠이 익숙해질 때즘, 디자이너는 조심스럽게 사랑에 대해 말했다. 포괄적이고 추상적인 사랑의 개념을 편향적으로 질문한 게 조금 미안하기도 했다. 그래도 그의 답변은 훌륭했다. “메르세데스-벤츠의 사랑은 조금 달라요. 맹목적이기도 하고 아가페적이기도 하죠. 전위적 사랑이라기 보다는 서로 존중하는 상호적인 사랑이에요. 중요한 것은 메르세데스-벤츠는 사랑을 받고 싶어한다는 거에요. 계속해서 사랑을 받기 위해 노력할 것이고, 저희는 그것을 디자인으로 표출할 것입니다.” 앞으로 니스에서는 따뜻하고 아름다운 자동차가 빚어질 것 같았다.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