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넬로 페라리 박물관에서 만난 특별한 페라리
  • 마라넬로=김상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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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5.05.21 17:20
마라넬로 페라리 박물관에서 만난 특별한 페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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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가니 공장과 람보르기니 박물관 관람에 이어 마라넬로 페라리 박물관으로 향했다. 마라넬로 페라리 박물관은 두번째 방문이다. 페라리 박물관은 본사와 공장이 위치한 마라넬로의 ‘뮤지오 페라리(Museo Ferrari)’와 엔초페라리를 기리기 위한 모데나의 ‘뮤지오 엔초페라리(Museo Enzo Ferrari)’로 나뉜다. 두 박물관의 입장료는 각각 15유로(약 1만8천원)다. 한번에 모두 표를 끊으면 4유로 할인 받는다.

▲ 마라넬로 뮤지오 페라리

마라넬로는 페라리의 성지인 만큼 언제나 단체 관람객이 많다. 최근엔 역시나 중국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박물관 주변 기념품 상점도 인기가 많고, 페라리를 태워주는 가게도 관광객이 많이 찾는다. 아무리 페라리지만 458 이탈리아를 십분 타는데 12만원 정도 내야한다. 기가 차지만, 타는 사람들은 줄을 섰다. 

 

페라리 박물관은 자동차 마니아가 아니라도 많이 찾는 랜드마크다. 그래서 다양한 프로그램도 운영 중이다. 셔틀버스를 타고 피오라노 서킷과 공장을 둘러볼 수 있고, F1 시뮬레이터나 F1 타이어 교체 체험도 할 수 있다. 물론 비싸다.

# 미국에 첫발을 내딛는 페라리

뮤지오 페라리는 때에 따라 테마를 달리하는데, 이번에 방문했을 때는 미국 진출 60주년을 기념한 전시가 진행됐다. 페라리답게 단순히 미국에서 판매된 페라리보단 미국 무대에서 활동한 레이스카 위주다.

비단 페라리 뿐만이 아니라 모든 유럽 브랜드에게 미국은 기회의 땅이었다. 페라리는 호시탐탐 미국 시장을 노리고 있었다. 이를 구체화한 것은 엔초페라리가 아닌 그의 후배, 루이지키네티(Luigi Chinetti)다. 그는 르망 24시간 내구레이스를 세번, 스파프랑코샹 24시간 내구레이스를 두번이나 우승한 드라이버이자 알파로메오 판매원이었다. 

▲ 312 T4와 F2012, F40 LM과 308 GT4 LM, 365 GTB4 데이토나 GT4, 티포 637 인디카(좌측 상단부터 시계 방향)

그는 2차 세계대전으로 혼란스러웠던 이탈리아를 떠나 1946년 미국 시민권을 취득했다. 그리고 인디500에 출전했고, 1949년에는 다시 르망 24시간 내구레이스에 출전해 페라리 166MM을 타고 우승을 차지했다. 당시 페라리는 미국 진출을 놓고 확신을 갖지 못했는데 키네티는 엔초에게 “충분히 성공할 것”이라며 그를 설득했다.

▲ 166 MM 베를리네타 비날레

결국, 페라리와 키네티는 1954년 뉴욕 맨해튼에 미국 최초의 페라리 대리점을 연다. 또 키네티는 이듬해 모터스포츠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페라리를 미국 모터스포츠 무대에 끌어들인다. 키네티는 1978년 페라리 미국 법인이 설립되기 전까지 미국의 ‘페라리 대부’로 이름을 알렸다. 

특히 키네티는 1958년 NART(North American Racing Team)를 만들었다. NART는 페라리로부터 레이스카를 공급받았다. 페라리 250GT로 세브링 12시간 내구레이스에 참가한 것을 시작으로 데이토나 24시간 내구레이스, 르망 24시간 내구레이스 등에 참가했다. 특히 1965년 르망 24시간 내구레이스에서 페라리 250LM으로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 250 LM

그러나 이듬해 페라리는 르망 24시간 내구레이스에서 포드 GT40에게 1, 2, 3위를 모두 내주는 굴욕을 겪기도 했다. 당시 유럽 레이스 무대를 주름잡던 페라리, 포르쉐, 알파로메오 등은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오벌 트랙만 달리는 줄 알았던 미국차는 1969년까지 연이어 우승을 차지했다. 이에 페라리는 서둘러 512S를 내놓았고, 포르쉐는 917을 개발하게 됐다. 그런데 포드는 페라리와 포르쉐의 새로운 레이스카가 등장할 무렵 르망 무대를 홀연히 떠났다.

▲ 275 GTB와 512S

# 페라리의 아메리칸 드림

풍요로운 미국엔 페라리를 선뜻 살 수 있는 소비자들이 많았다. 페라리는 어떻게든 그들에게 잘 보일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미국을 위한 페라리를 만들었다.

▲ 500 슈퍼패스트, 400 슈퍼아메리카, 330 아메리카, 250GT 캘리포니아 스파이더(좌측 상단에서부터 시계 방향으로)

페라리는 전통적으로 엔진 기통과 배기량을 가늠할 수 있는 숫자와 차의 성격을 나타내는 알파벳을 주로 쓴다. 또 모데나, 마라넬로, 피오라노 등 페라리와 관련된 지명을 붙이기도 한다. 페라리는 미국을 위해 유례없이 이름에 아메리카, 캘리포니아 등을 붙이기 시작했다. 또 다분히 미국적인 이름을 갖고 있는 슈퍼패스트, 슈퍼아메리카 등도 선보였다. 캘리포니아는 현재 페라리의 엔트리 모델로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 조금은 특별한 페라리

페라리는 이탈리아 최고의 코치빌더들과 함께 작업했다. 예술적인 페라리를 만들겠다는 목표는 같았지만, 그들은 자신의 특징을 숨기지 않았다. 그래서 디자인에 통일성이 없던 시기도 있었다. 미국 특별전시와 관련해 박물관엔 코치빌더가 아닌 미국의 일개 페라리 마니아가 제작한 페라리도 전시됐다.

▲ Wake up, Schumi!

캘리포니아에 거주하던 미국인 톰미드(Tom Meade)는 해병으로 일하면서 멋진 자동차를 소유하겠다는 꿈을 꿨다. 막연했던 그의 꿈은 페라리 테스타 로사를 본 후 구체화됐다. 그는 곧바로 친구 한명과 무작정 이탈리아로 향했다. 히치하이킹으로 미대륙을 횡단하고 노르웨이 곡물 화물선의 식당 직원으로 취직해 유럽까지 갔다. 

노르웨이 스타방게르에 도착한 그는 화물선에서 받은 보수로 오토바이를 구입해 로마로 향했고, 로마에서 몇달을 머물다 모데나로 향했다. 당돌하고 카리스마 넘쳤던 톰미드는 우연히 마세라티 본사에서 마세라티 레이싱팀 감독을 만났고, 그를 설득해 고장난 350S의 차체를 구입했다. 또 그의 도움으로 코치빌더 판투치(Fantuzzi)와 연락이 닿았고, 판투치와 함께 완전히 새로운 차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는 그의 차에 ‘톰이 만든 최고의 것(Maximum)’이란 뜻을 담고 있는 ‘토마시마(Thomassima)’란 이름을 붙였다. 

▲ 토마시마3

토마시마1을 완성한 톰은 다시 미국으로 건너와 차를 팔고, 수익으로 마세라티의 차체를 또 구입했다. 여기에 페라리 250GT의 엔진과 ZF 변속기를 장착한 토마시마2를 제작했다. 

박물관에 전시된 차는 토마시마3로 토마시마2와 동일하게 250GT의 3.0리터 V12 엔진과 ZF 변속기가 탑재됐고, 디자인은 페라리 330 P4에서 영감을 얻었다. 토마시마3는 1969년 토리노 모터쇼에 전시되며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톰은 이를 계기로 엔초와 가까워졌고, 페라리는 토마시마 또한 페라리의 한 줄기라고 인정하고 있다.

▲ 페라리 콜라니 테스타 도로

독일 출신의 디자이너 루이지콜라니(Luigi Colani)와 함께 제작한 페라리 ‘테스타 도로(Testa d’Oro)’도 전시됐다. 루이지콜라니는 자동차, 모터사이클, 비행기부터 안경, 카메라, 보석, 가구, 건물 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디자인 역량을 발휘한 20세기 최고의 디자이너다. 특히 그는 자연으로부터 얻은 영감을 바탕으로 유려한 디자인을 내세웠다. 또 공기역학을 제대로 공부한 사람이었다. 그가 만든 테스타 도로는 공기역학 디자인이 적용돼 미국 보네빌 사막에서 시속 351km의 최고속도를 기록했다. 

# 페라리의 새로운 ‘얼굴’

2012년 박물관에 왔을땐 라페라리가 공개되기 전이었다. 애석하게도 그후로 수많은 해외 모터쇼를 갔는데, 라페라리를 실제로 보진 못했다. 사실 이번에 박물관을 다시 찾은 이유는 라페라리를 알현하기 위해서다. 주로 최신 모델은 2층에 전시되는데, 아무리 찾아도 보이질 않았다.

결국 또 못보는 것인가 포기할 찰나, 전시장 구석에서 검은 커튼을 열고 관람객 두어명이 나왔다. 혹시하는 생각에 다가가 커튼을 열고 방에 들어섰다. 캄캄한 암실이었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스마트폰을 꺼내려는 순간 희미한 엔진 소리가 점점 커졌다. 마치 저멀리 있던 페라리가 전속력으로 나에게 다가오는 것 같았다. 앙칼진 엔진 소리가 정점에 달했을때 희미한 조명이 켜지며, 라페라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조명 탓에 라페라리의 굴곡이 더욱 선명히 보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름다웠다. 

▲ 라페라리

최근 페라리는 디자인 방향성을 잡기 위해 노력 중이다. 인하우스 디자인팀에 더 무게를 둘 계획이다. 라페라리는 피닌파리나가 아닌 페라리 인하우스 디자인팀에서 제작된 최초의 페라리다. 페라리는 앞으로도 피닌파리나와 끈끈한 관계를 유지할 것이라고 설명했지만, 이미 여러 유능한 디자이너를 영입했고 488 GTB에서도 라페라리의 영향을 확인할 수 있다. 앞으로 페라리의 디자인이 어떻게 바뀔 것인지는 더 지켜봐야 한다.

라페라리를 봤으니 마라넬로 뮤지오 페라리에서 할일은 다 한 셈이다. 10분에 무려 3만원이나 하는 F1 시뮬레이터를 체험해볼까 했는데, 끝도 없이 밀려드는 중국인들을 보고 서둘러 모데나에 위치한 뮤지오 엔초페라리로 향했다. 원래 마라넬로 뮤지오 페라리만 보고 가려 했는데, 할인 티켓 때문에 가게 됐다. 또 마땅히 이탈리아에서 할일도 없었다. 그런데 막상 뮤지오 엔초페라리에 가보니, 그냥 지나쳤다면 땅을 치고 후회할 뻔 했다.

▲ 모데나에 위치한 뮤지오 엔초페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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