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틀리 플라잉스퍼는 큰 형님 뮬산이 단종되며 자연스레 브랜드 플래그십 자리를 이어받았다. 강력한 경쟁자들이 포진한 럭셔리 세그먼트에서 신형 플라잉스퍼는 브랜드 대표 역할을 잘 수행할 수 있을까.

이번에 만난 모델은 지난 2019년 풀 체인지를 거친 3세대 플라잉스퍼 V8 모델이다. 글로벌 시장에는 W12 엔진을 얹은 상위 모델이 존재하지만, 국내 출시는 미정이다.

새로운 헤드램프는 무수히 많은 선과 조명이 어우러져 마치 유리 공예품을 보는 듯하다.
새로운 헤드램프는 무수히 많은 선과 조명이 어우러져 마치 유리 공예품을 보는 듯하다.

외관은 기존 브랜드 디자인 철학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넓고 낮게 깔린 차체와 동그란 눈은 한 눈에 봐도 벤틀리임을 알린다. 보닛을 가로지르는 크롬 라인은 과거 후드가 좌우로 열리던 시절의 오마주다. '플라잉 B'라 불리는 돌출형 로고는 밤이 되면 날개에서 빛을 내며 존재감을 발산한다. 도난 방지를 위해 잡아당길 경우 숨어버리는 '깨알' 기능도 갖췄다.

2세대 모델과 가장 큰 차이점은 헤드램프 배치다. 이전에는 바깥쪽이 크고 안쪽이 작은 원형 헤드램프를 장착했지만, 3세대 모델은 안쪽이 크고 바깥쪽이 작은 형태로 바뀌었다. 이러한 형태는 기존 플래그십이었던 뮬산과 비슷하다. 기함 자리를 넘겨주겠다는 벤틀리의 뜻일까.

이밖에 측면부는 전통적인 3박스 세단의 모습을 구현했으며 테일램프에는 알파벳 'B'를 형상화한 디테일이 자리한다.

플라잉스퍼의 백미는 인테리어다. 고급스러운 마감 소재와 은은한 조명, 고요한 실내, 여기에 차 안을 맴도는 가죽 향기까지 오감을 만족시킨다.

손길이 닿는 곳 대부분을 최상급 가죽으로 둘렀다. 드넓은 대시보드와 도어트림은 물론, 필러와 루프라인 전체가 해당된다. 양가죽 소재 플로어매트는 럭셔리의 화룡점정이다. 손가락 두 마디가 쑥 들어갈 정도로 부드럽고 두툼한 매트는 신발로 벗고 밟아야 하나 고민할 정도다.

더불어 리얼 크롬 장식이 실내 곳곳에 쓰였다. 특히 센터 송풍구와 시계를 두드려보면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진다. 따듯한 느낌의 가죽과 차가운 느낌의 금속이 어우러져 품격있는 실내 분위기를 연출한다.

이전 세대에서 단점으로 지적됐던 인포테인먼트 디스플레이는 그야말로 환골탈태했다. 단순히 고정된 디스플레이를 켜고 끄는 방식에서 벗어나, 화면 전체를 회전시키는 '로테이팅 디스플레이'가 장착됐다.

시동을 걸면 대시보드 중앙 섹션이 회전하면서 숨어있던 12.3인치 터치스크린이 나타난다. 운전자는 'SCREEN' 버튼을 눌러 화면을 숨기거나, 외부온도 및 나침반, 크로노미터 등을 보여주는 3구형 클래식 다이얼로 선택할 수 있다. 서로 다른 세 가지 다른 표면을 통해 다양한 인테리어 분위기를 연출한다.

이렇듯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실내임에도 의외의 단점이 있는데, 바로 앞좌석에 별도의 센터 콘솔박스가 없다. 언뜻 열릴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오롯이 팔받침대 역할만 한다. 실내 공간은 넉넉하지만 마땅히 수납할 곳이 없다.

2열은 차체 크기와 가격을 생각하면 조금은 아쉽다.

플라잉스퍼의 전장은 5316mm로, 메르세데스-벤츠 신형 S580(5290mm)보다 길다. 그러나 S580은 원터치로 조수석을 밀어내 다리를 쭉 뻗을 공간을 확보하는 반면, 플라잉스퍼는 약간의 기울기 조정만 가능한 수준이다. 고급스럽고 넉넉한 시트가 만들어내는 분위기는 충분히 럭셔리하지만, 럭셔리 브랜드의 이미지에는 살짝 부족한 느낌이다.

승차감은 고급스러우면서도 운동성을 놓치지 않았다.

저속에서는 부드러운 에어 서스펜션이 노면의 잔진동을 깔끔하게 흡수한다. 과속방지턱과 같은 큰 요철을 지날 때도 마찬가지. 고요한 실내와 부드러운 서스펜션이 어우러져 고급스러운 주행 질감을 만들어낸다. 반면, 고속에서는 의외로 단단하다. 최고속도가 318km/h에 달하는 초고성능 세단인만큼, 고속 안정성을 위해 운동성을 놓치지 않았다.

플라잉스퍼의 4.0리터 V8 트윈터보 심장은 최고출력 550마력, 최대토크 78.5kgf·m를 발휘한다. 제원상 정지 상태에서 100km/h까지 도달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4.1초다.

최적의 출발 가속을 돕는 런치 컨트롤을 시도했다. 엔진회전수가 4000rpm에 고정되며 달려나갈 준비를 마친다. 브레이크 페달에서 발을 떼자, 공이가 총알을 때리는 듯한 변속 충격이 전해진다. 100km/h까지 도달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3.9초. 다양한 노면에서 시도해도 꾸준히 4.0초 이하 기록을 보였다. 2.5톤에 달하는 공차중량이 무색하게 만드는 엄청난 가속력이다.

생각외로 연비도 좋다. 막히는 시내 구간을 포함해 70km의 출퇴근길 연비는 리터당 평균 7.5km를 기록했다. 여기에는 실린더 휴지 기능이 한몫을 한다. 플라잉스퍼의 V8 엔진은 부하가 적은 상황에서 실린더 8개 중 4개를 비활성화해 연료 소모를 최소한다. 장시간 이어진 100km/h 항속 주행에서는 연비가 12.5km/L까지 올랐다.

연료탱크 용량이 90리터나 되기 때문에 주유소를 자주 찾을 필요도 없다.

플라잉스퍼는 예상과 달리 오너드리븐 성향이 강한 럭셔리 스포츠 세단에 더 가깝다. 호화로운 실내와 강력한 성능을 갖추면서 동시에 비교적 젊은 이미지를 보여준다. 마이바흐 S클래스의 회장님 이미지가 부담스러운 젊은 고객층이라면, 충분히 고려해볼만 한 대상이다. 벤틀리 플라잉스퍼 V8 가격은 3억3300만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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