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슬라가 수퍼차저를 개방하자 미국 완성차 업체들이 테슬라의 충전 규격을 따르기로 결정했다. 테슬라는 충전사업자로서 정부 보조금을 챙기고, 다른 자동차 회사들은 테슬라의 광범위한 충전 네트워크를 얻는 효과를 얻겠다는 전략이다. 테슬라의 충전 시스템이 미국의 새로운 표준으로 자리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당장 국내에도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그동안 우리나라 충전은 미국을 따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이 테슬라 규격으로 바뀌면 대한민국은 말 그대로 '닭 쫓던 개' 신세가 될 수도 있는 상황이다. 하루라도 빨리 국내 충전 규격을 바꿔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는 이유다.

왜 이런 상황이 발생했는지 모터그래프에서 자세히 살펴봤다.

# 대세는 테슬라? 충전 규격 바꾸는 북미 전기차 시장

최근 GM과 포드 등 미국 자동차 제조사가 앞으로 출시할 전기차에 테슬라 충전 규격(NACS, North American Charging Standard)을 탑재하겠다고 선언했다. 스텔란티스 역시 해당 규격 적용에 대한 긍정적인 신호를 보내고 있다. 심지어 '제2의 테슬라'로 불리던 리비안조차 테슬라의 충전망을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미국 완성차 업체들은 어쩌다 테슬라 충전 규격을 쓰기로 했을까. 

테슬라 수퍼차저
테슬라 수퍼차저

작년 미국 정부는 전기차 충전소 확장을 위해 5년간 75억달러(9조6000억원)를 지원한다고 밝혔다. 다만, 충전사업자가 보조금을 받기 위해서는 미국 표준인 'DC 콤보 CCS 타입1(이하 CCS1)' 방식을 채택해야 한다는 조항이 있었다. 당시 업계에서는 해당 정책이 테슬라를 저격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테슬라 충전기인 슈퍼차저는 CCS1이 아니라 'NACS'라는 독자 규격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백악관은 "공적 자금이 지원되는 전기차 충전시설은 모든 운전자가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라며 "테슬라가 수퍼차저를 타사 전기차에 개방한다면 보조금 대상에 포함될 수 있다"고 말했다. 테슬라에게 살 길을 열어준 것이다.

협박(?)이 먹힌 것일까. 테슬라는 치열한 고민 끝에 자존심 대신 보조금을 선택했다. 올해 초 "2024년 말까지 최소 7500개 수퍼차저를 모든 전기차에 개방하겠다"는 발표와 함께 NACS의 디자인과 사양을 전격 공개했다. 순식간에 미국 전역에 설치된 고성능 충전 네트워크를 확보하게 된 GM과 포드 등 완성차 업체들은 앞으로 출시 예정인 신형 전기차에 NACS를 적용하기로 하는 등 발빠른 대처에 나섰다.

# 불똥 튄 한국, 우리는 왜 미국 표준을 따랐을까?

우리나라는 지난 2016년부터 미국과 동일한 DC 콤보 CCS1을 국가 표준으로 지정하고 있다. 이전에 출시된 전기차들은 AC 3상, 차데모 등 다양한 포트를 적용했는데, 표준이 정해진 이후에는 CCS1으로 바뀌었다.

불똥은 우리나라로 튀었다. 지금까지 미국 표준을 잘 따르고 있었는데, 난데없이 표준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졸지에 한국의 전기차 충전 규격이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될 처지에 놓인 셈이다.

국내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DC 콤보 CCS1 충전구. 북미 시장과 동일한 규격이다.
국내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DC 콤보 CCS1 충전구. 북미 시장과 동일한 규격이다.

문제는 CCS1이 미국과 같다는 점을 제외하면 별다른 장점이 없다는 것이다. CCS1 자체가 미국의 배전 방식(단상-220V)으로 개발된 것인데, 한국의 배전 체계는 이와 다른 3상-380V다. 당연히 효율이 떨어질 수밖에 없는데, 특히 완속 충전에서 이런 단점은 두드러진다. 20kWh 이상의 속도를 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7kWh로 제한되기 때문이다. 충전 속도가 1/3 수준으로 느려져 그만큼 시간이 오래 걸린다.

한국국가기술표준원은 CCS1을 표준으로 제정할 당시 "자동차 산업의 현상을 고려해 CCS1을 국가 표준으로 선정했다"고 주장했다. 공교롭게도 이 결정은 현대차그룹의 미국 전기차 수출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업계 한 전문가는 "CCS1이 표준이 되면서 현대차그룹은 별도의 구조변경 없이도 미국 수출형과 내수용 모델에 모두 사용할 수 있게 됐다"고 꼬집었다.

# 우리나라도 충전 표준 바뀌어야

미국이 테슬라의 NACS를 표준으로 채택한다면, 한국은 CCS1을 사용하는 유일한 나라가 된다. 가뜩이나 우리나라 실정에 맞지 않는 비효율적인 규격을 나홀로 사용하는 셈이다. 글로벌 시장과 단절되는 '갈라파고스화'가 우려된다. 미국이 바뀐다면, 우리나라도 바꿔야 한다는 주장에 설득력이 실리는 부분이다.

지역별 전기차 충전규격=한국자동차연구원
지역별 전기차 충전규격=한국자동차연구원

당장 미국이 아니라 유럽 표준인 'DC 콤보 CCS2'로 바꿔야 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CCS2는 한국 배전에 적합한 3상 방식으로, 충전 효율을 온전히 끌어낼 수 있다. 또, 유럽의 다양한 제조사가 사용하는 표준인 만큼, 더 많은 제조사와 함께 기술 개선을 기대할 수 있다. 전환 비용이 저렴하다는 장점도 있다. 포트 등 간단한 부품만 교체하면 기존 국내에 설치된 충전망을 그대로 이용할 수 있다.

일부에서는 현행 CCS1을 그대로 쓰자는 의견과 미국을 따라 NACS로 바꾸자는 이야기도 나온다. 그러나 업계 전문가들은 합리적이지 못하다는 평가다. 한 전문가는 "NACS는 CCS1과 마찬가지로 미국 단상 배전에 최적화한 규격"이라며 "NACS로 바꾸는 건 제자리 걸음이나 마찬가지"라고 주장했다. 

# 회의적인 현대차그룹, "NACS? 글쎄…"

현대차그룹은 NACS로 바꾸는 것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으로 보인다. 현대차 장재훈 사장은 최근 열린 투자자 행사에서 "우리는 800V 체계에 맞게 차량을 설계한 반면, 테슬라는 최대 500V 충전만 가능하다"라며 "충전 시간이 늘어나면서 고객 불만이 나올 수 있다"고 말했다. 적어도 당분간은 미국 충전 흐름을 따르지 않겠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현대차그룹 이피트 충전소
현대차그룹 이피트 충전소

실제로 현대차그룹은 지난 2020년부터 자사의 최신형 전기차에 800V 충전 시스템을 탑재하고 있다. 전기차 전용 플랫폼 'E-GMP'를 기반으로 만든 현대차 아이오닉5·아이오닉6, 기아 EV6·EV9, 제네시스 GV60 등에는 이 시스템이 들어있다. 현대차그룹의 자체 초고속 충전 시설인 이피트(e-pit) 역시 800V 환경에 맞춰 건설됐고, 유럽에서도 아이오니티를 통해 800V 충전망을 구축하고 있다. 참고로 아이오니티는 현대차그룹을 비롯해 포르쉐, 폭스바겐, BMW, 다임러(벤츠) 등이 고출력 충전 네트워크 확대를 위해 만든 합작 회사다.

전압이 높을수록 충전 전력을 높이는데 수월하다. 전력이 높으면 그만큼 충전 시간은 줄어든다. 500V 충전 시스템으로 받을 수 있는 최대전력은 약 150~250kW 수준인 반면, 800V 충전 시스템을 탑재하면 270~350kW로 충전할 수 있다. 그만큼 충전 시간이 확 줄어드는 것이다. 현대차그룹 입장에서 굳이 기술적 하위 사양으로 볼 수 있는 NACS를 환영할 이유가 없다는 분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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