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의 '벤스'는 말이야, 정말 아무나 탈 수 없는 최고의 차였다고."

메르세데스-벤츠 280TE
메르세데스-벤츠 280TE

어르신과 자동차 이야기를 하다보면 간혹 듣게 되는 말이다. 지금에야 벤츠 혹은 메르세데스 라고 부르는 게 일반적이지만, 노년층은 당신들의 젋었을 적 동경의 대상을 '벤스'라고 부른다.

그 '벤스'를 몰아볼 기회가 생길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것도 메르세데스-벤츠 헤리티지 부서에서 완벽한 상태로 보존 중인 W123 E클래스다. 왜건에 수동변속기가 달린, 누적 주행거리가 4만km도 되지 않은 '벤스 280TE'를 시승했다.

# W123, 가장 성공적이었던 E클래스

과거로의 여행을 떠나기에 앞서 W123 E클래스가 어떤 차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W123은 1976년 처음 등장한 모델로, 5세대 E클래스에 해당한다. 우리나라에선 자동차 산업이 막 태동하던 시기인데, 벤츠는 이미 E클래스를 5세대까지 진화시켰다. 어마어마한 격차다. 

메르세데스-벤츠 280TE
메르세데스-벤츠 280TE

W123은 '처음' 이라는 타이틀도 꽤 많이 갖고 있다. ABS가 옵션으로 제공된 첫 E클래스였던 데다, 운전석 에어백도 동급 최초로 적용했다. 왜건형 E클래스가 등장한 것도 이 때차 처음이었고, 터보 디젤엔진을 쓴 최초의 독일제 승용차라는 기록도 보유 중이다. 

많은 부분들이 새로워서일까. W123은 11세대에 걸친 E클래스 역사상 가장 성공한 모델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출시 이후 단종까지 약 270만대가 판매됐는데, 역대 E클래스를 통틀어도 가장 많은 축에 속한다. 엄청난 인기에 딜러에서 웃돈을 주고 거래됐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메르세데스-벤츠 280TE
메르세데스-벤츠 280TE

오늘날의 벤츠는 모든 왜건을 '에스테이트' 라고 부르지만, 당시에는 280TE처럼 중간에 T를 붙였다. 여행(Touring)과 운송(Transport)을 뜻한다. 더욱이 대량 생산시설에서 양산되는게 아니라, 코치빌더를 통한 별도의 과정을 거쳤다. 까다로운 공정에도 20만대 가량이 팔려나갔단 점에서 당시의 폭발적인 인기를 짐작케 한다. 

# 지금도 꿀리지 않는 주행성능

차량을 구동시키는건 전혀 어렵지 않았다. 운전석 좌측 하단의 동그란 레버를 당겨주면 주차 브레이크가 해제된다는 게 요즘 차와 다르다. RPM 게이지 대신 커다란 아날로그 시계가 클러스터에 자리해있는 것도 차이점이다. 

메르세데스-벤츠 280TE
메르세데스-벤츠 280TE

280TE의 파워트레인은 2.8리터 SOHC 직렬 6기통 자연흡기 가솔린 엔진과 4단 수동변속기다. 5800rpm에서 최고출력 185마력을 냈고, 최대토크는 4500rpm에서 24.8kgf·m을 발휘했다. 정지상태에서 100km/h까지 주파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9.9초, 최고속도는 200km/h에 이른다. 

1979년식이라는걸 생각하면 상당한 고성능이다. 공차중량은 1475kg으로 요즘 중형차와 비슷하다. 이렇다보니 제법 경쾌하게 움직인다. 오래된 차라고 믿기 힘들 정도로 클러치 유격은 익숙하고, 승차감은 믿기 어려울 정도로 부드럽다. 생각보단 잘 정제된 직렬 6기통 엔진 소리를 들으며 빈 외곽의 시골길을 달리니 여느 시대극의 배경 속으로 들어온 느낌이다. 

메르세데스-벤츠 280TE
메르세데스-벤츠 280TE

서스펜션은 전륜 맥퍼슨 스트럿, 후륜 리프 스프링 구조다. 지금의 벤츠에서 상상할 수 없는 조합이지만 의외로 승차감이 괜찮다. 용수철이 내장된 시트 탓에 요철을 만나면 잔진동이 제법 오래 느껴지지만, 몸으로 충격이 직접 전달되는 기분 나쁜 통통거림은 없다. '역시는 역시'라는 요즘 말이 스친다.

4단 수동변속기의 조작감은 두피를 저릿거리게 만들었다. 클러치를 밟고 다음 단으로 레버를 이동시키는 과정이 너무 자연스럽다. 1단에서 2단, 3단을 거쳐 최종 기어인 4단까지. 체결 직전의 기어가 미리 준비라도 했다는 듯 변속기 레버를 쑤욱 끌어당기는 손맛은 지금 까지도 잊혀지지 않는다. 

요즘의 차들과는 비교하기 힘든 헐렁헐렁한 스티어링휠 감각도 재미있다. 지금 나오는 신차라면 호된 비판을 했겠지만, 40년이 넘은 자동차를 두고 단점들을 일일이 짚어내는 것은 구차하다. 오히려 여유있게 시골길을 달리는 맛이 쏠쏠하다.

메르세데스-벤츠 280TE
메르세데스-벤츠 280TE

지정된 코스 한 바퀴를 돌아 나온 뒤, 두 번째 바퀴에서 속도를 높였다. 회전계가 없으니 차에서 느껴지는 진동과 엔진음만으로 변속 타이밍을 맞춰야 했다. 다행히 280TE는 친절하다. 기어비가 짧아 60km/h 인근까지 가속하는데 4단 기어를 다 써버렸고, 이후에는 왼발과 오른손에 여유를 주고 편안하게 달렸다. 

가속이 필요할 땐 3단 기어를 넣어주면 그만이다. 매끄럽던 6기통 엔진이 제법 껄끄러운 소리를 토해내며 튀어 나간다. 지금의 자동차들과 비교해도 꿀릴 게 없는 성능에 헛웃음이 나왔다. 그 시절 280TE는 아우토반을 얼마나 날쌔게 달렸을까. 

# 반듯함 속에 숨은 멋

280TE의 외형은 그 시절 '벤스'가 보여줬던 반듯함 그 자체다. 네모난 헤드램프와 네모난 그릴, 각진 루프라인까지, 요소 하나하나가 자로 잰 듯 반듯하게 디자인됐다. 지금의 E클래스가 S클래스와의 일정 부분 유사성을 갖고 있듯 그 시절의 E클래스도 당대의 S클래스(W116)와 꼭 닮아있다. 

메르세데스-벤츠 280TE
메르세데스-벤츠 280TE

전장 4795mm, 전폭 1784mm, 휠베이스는 2795mm다. 요즘 중형차들보다 작은 사이즈지만, 비슷한 시기에 등장한 최초의 5시리즈(E12)와 비교하면 압도적으로 크다. 그 시절 유복한 중산층 가정이 여유로운 공간을 영위할 수 있는, 성격이나 목적이 분명한 차였다는 점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외관에서 가장 눈길을 끈건 크롬으로 마감된 루프랙이다. 화물을 고정하거나 무언가를 거치할 때 흠집이 날 게 뻔하지만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는듯 햇빛을 반사하며 번쩍인다. 

메르세데스-벤츠 280TE
메르세데스-벤츠 280TE

실내는 옛 느낌이 가득하지만 촌스럽지는 않다. 지금의 승용차에선 말도 안되는 거대한 스티어링 휠과 큼지막한 삼각별 로고,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온 원형 송풍구가 눈길을 끈다. 세련된 인테리어 컬러는 물론, 그럴싸한 카펫으로 마감해둔 플로어는 고급감을 더한다. 

40년이 넘은 자동차임에도 있을건 다 있다. 에어컨은 물론 라디오도 정상적으로 잘 작동한다. 이른바 '닭다리'를 돌려 여닫는 창문과 수동식으로 조작하는 사이드미러 레버는 도대체 얼마만인지, 창문을 올리고 내리는게 제법 신기하다. 그 와중에 잡소리 소리 하나 안들린다.

# 1979년식 벤츠에서 오래된 건축물이 느껴진 이유

오래된 건축물은 그 시대의 기술 수준과 관점, 그리고 설계자가 보여주고 싶었던 이상향을 담고 있다. 자동차도 마찬가지다. 1979년식 280TE는 그 시절 메르세데스-벤츠의 기술력이 어느정도였는지, 이 차를 통해 어떤 가치를 보여주고 싶었는지를 뚜렷이 보여줬다. 

메르세데스-벤츠 280TE
메르세데스-벤츠 280TE

280TE는 그 시절의 '벤스'가 어땠는지를 보여주는 시간 여행자, 그 자체였다. 오랜 세월에도 완벽한 차량 컨디션은 지금 당장 아우토반을 달리기에도 손색 없었고, 편안한 승차감과 넉넉한 공간은 그 시절 중산층의 풍요로운 삶을 가늠케 했다. 

시간 여행을 마친 뒤 몇 가지 생각이 스쳤다. 제조사 차원에서 이렇게 유서 깊은 모델들을 보존하고, 시승이 가능할 만큼의 컨디션을 유지하고 있다는 게 부러웠다. 우리나라에서는 언제쯤 이런 그림을 만나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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