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C60을 그린 한국인 디자이너' 이정현이 볼보를 떠나 이탈리아로 자리를 옮겼다. 페라리나 람보르기니 같은 슈퍼카 회사로 간 것도 아니고, 이탈디자인이나 피닌파리나같은 카로체리아도 이직한 것도 아니었다. 그는 중국 5위권의 자동차 제조사인 창안자동차의 유럽 디자인센터에서 외장 디자인 디렉터 자리를 맡게 됐다.

조금은 놀랐다. 볼보에서 보여줬던 디자인도 그랬지만, 그가 앞으로 보여줄 볼보가 더욱 기대됐던 까닭이다. 다른 나라 브랜드도 아니고 중국 브랜드라니 더욱 아쉬웠다. 그가 추구해왔던 '슬릭(매끈한)'한 디자인과 중국차의 화려한 외형은 별다른 연관성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이정현 디자이너 역시 이런 선입견에 맞설 준비에 한창이었다. 스웨덴차와 독일차를 하나의 범주로 묶기 어렵듯, 중국차 역시 각각 추구해온 가치와 목표는 모두 다르다는 설명이다. 특히, 중국차에 뿌리내린 지독한 편견을 자신만의 철학으로 지우고, 그 자리에 새로운 디자인을 채우겠다고 강조했다. 모터그래프가 새로운 도전을 시작한 이정현 디자이너와 인터뷰를 진행했다. 

이정현 디자이너
이정현 디자이너

Q. 소식을 듣고 놀랐다. 이직을 결심한 배경이 궁금하다.

우선, 볼보에서 14년간 근무하며 많은 것을 배우고 경험할 수 있었다. 주어진 다양한 프로젝트는 항상 있어왔고, 각각의 프로젝트마다 책임감을 갖고 진행해왔지만, 어느 순간 뒤돌아볼 때, 너무 익숙한 환경에서 익숙한 일들만 반복적으로 해오고 있다는 마음이 들었다. 변화가 필요했다. 편안한 곳에서 편한 일들만 반복적으로 하다 보니 제 그릇을 키우고 발전할 수 있는 범위를 스스로 제한하는 느낌이었다. 스스로를 좀 더 성장시킬 수 있는 새로운 환경과 직책에서 일해보고자 하는 마음에 이직을 준비해왔고, 기회가 와서 이직을 결심하게 됐다. 

Q. 14년간 근무한 회사를 떠난 소회는 어떤가. 

오랜 기간 근무한 친정 같은 회사를 떠난다는 결정을 하고 나니 개인적으로는 마음이 많이 좋지 않았다. 항상 감사하고 사랑했던 볼보를 하루 아침에 떠난다고 생각하니 한동안 심란했다. 30대와 40대 절반의 희로애락을 함께 했던 회사였고, 친구들이나 지인들과 자동차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때면 자연스레 볼보 세일즈맨으로 분했던. 나에게 많은 추억을 만들어준 회사다. 한국, 스웨덴, 미국의 정들었던 직장 동료들과 작별한다는 것이 쉬운 결정은 아니었다. 

이정현 디자이너의 볼보 XC60 스케치
이정현 디자이너의 볼보 XC60 스케치

Q. 이직을 결정했을 때 내부의 반응은 어땠나.

볼보에 계속 남을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보자고 했다. 몇 년 전에 본사에서 스웨덴 복귀를 요청했는데, 미국에 계속 체류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아마 회사에서는 내가 LA 디자인센터에서 계속 근무할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마음의 결정을 확고히 했던 터라 정중히 거절했고, 이를 회사에서도 존중해줬다. 이탈리아로 출국하는 날이 퇴사일로부터 약 한 달 이후였음에도 미국 생활을 잘 마무리 할 수 있도록 많은 지원을 해줘 자연스레 이직할 수 있었다. 무척 고마운 부분이다.

Q. 볼보 디자인센터에 한국인들이 많아진 것 같다. 이들의 역량은 어느정도인가. 

예테보리 디자인센터를 떠나 미국 지사 주재원으로 온 게 2018년이고, 이후 한국 디자이너들이 본사에 몇 명 더 근무를 하게 된 것으로 안다. 직접 같이 일해본 경험은 없지만, 이들의 작업물을 익히 봐서 잘 알고 있다. 모두들 타국에서 그들만의 뛰어난 역량으로 스웨덴 본사 뿐만 아니라 미국과 중국 지사에서 없어서는 안될 재원임을 증명해나가고 있다. 

Q. 마지막까지 참여했던 프로젝트가 있다면 무엇인가.

잘 아는 바와 같이 구체적으로 말할 수 없는 사항이다. 다음 세대 볼보 라인업 중 하나의 양산 프로젝트와 현재 볼보 라인업에는 없는 또 다른 콘셉트 및 양산 작업을 진행 중이었다. 

한국에서의 볼보 XC60 론칭. 이정현 디자이너가 항상 꿈꿔왔던 순간이다.
한국에서의 볼보 XC60 론칭. 이정현 디자이너가 항상 꿈꿔왔던 순간이다.

Q. 볼보에서 근무하며 가장 기억에 남았던 순간은 언제였나.

한국에서의 XC60 론칭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XC60을 디자인하며 한국에 이 차를 선보이는 장면을 항상 꿈꿔왔고, 그 꿈이 현실로 이뤄졌던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14년간 볼보에서 근무하며 가장 보람 있고 뜻깊은 순간이었다. 이를 계획하고 만들어준 볼보자동차코리아에도 감사드린다. 

Q. 앞으로의 볼보, 어떤 가치를 이어가야 한다고 생각하나. 

볼보의 가치는 너무나 단순하면서도 명확하다. 바로 사람이다. 그 가치를 디자인적 측면에서나 엔지니어링, 마케팅 등 전 분야에 걸쳐 지금과 같이 꾸준히 유지하고 발전시켜나가고 있다. 앞으로도 더욱 성장하리라 확신한다. 

Q. 새로운 곳에서는 어떤 업무를 맡게 되는지 궁금하다. 

익스테리어 디자인 디렉터의 직책으로 외장 디자인을 책임지게 됐다. 

창안자동차 C385
창안자동차 C385

Q. 회사 내부의 분위기는 어떤지도 궁금하다. 

이태리의 산업도시 토리노에 위치한 회사인 만큼 유럽인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렇다 보니 인력 구성은 볼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다른 점이라면 프로젝트 진행 속도다. 볼보에서의 체계적이고 효율적인 시스템도 매우 빠른 속도로 진행된다고 생각했는데, 이곳은 또 다른 속도로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다는걸 경험하고 있다. 프로세스가 빠르다고 해서 무조건 긍정적이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부정적인 분을 수정하고 보완해 나가는 것이 나에게 주어진 업무의 일부라고 생각한다. 

Q. 지금까지의 중국 자동차 산업과 지금 느끼는 점의 차이가 있을까.

불과 몇 년 전까지의 중국 자동차라고 한다면 흔히 카피캣 디자인을 떠올렸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그런 브랜드들을 찾기 힘들어졌다. 다르게 말한다면 그러한 과정들을 통해 중국 자동차 산업이 다음 단계로 발전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디자인 카피를 넘어 다른 브랜드의 디자인을 연구하고 분해하며, 분석하는게 자신들만의 것을 만들어가는 과정이었을 것이다. "훌륭한 예술가는 베끼고, 위대한 예술가는 훔친다"라는 파블로 피카소의 말처럼 다른 브랜드의 기술력과 디자인적 성숙함을 자기들의 것으로 만드는 흡입력은 거대 자본이 실력있는 연구인력들을 대거 영입함에 따라 더욱 빨라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Q. 그 막대한 '자본력'을 체감한 부분이 있다면 무엇일까. 

회사에서 가장 큰 자본력이 필요한 부분 중 하나는 인력이다. 지금까지 느낄 수 있었던 것 중 하나도 인력 충원 규모의 차이였다. 일반적인 유럽 자동차 회사들의 규모와 비교했을 때 그 차이가 가장 눈에 띄었다. 

이정현 디자이너는 인상깊게 본 중국차로 리 오토(Li Auto, 理想汽车)를 꼽았다. 사진은 리 오토의 전기 SUV L9.
이정현 디자이너는 인상깊게 본 중국차로 리 오토(Li Auto, 理想汽车)를 꼽았다. 사진은 리 오토의 전기 SUV L9.

Q. 중국 자동차 업계에도 한국인 디자이너들이 많이 근무하고 있나.

이제는 전 세계의 어떠한 자동차 업체에서도 한국인 디자이너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한국인 특유의 근면함과 창의성, 무엇보다 개인보다는 팀워크를 항상 우선순위에 두눈 겸손한 자세가 특징이다. 이를 바탕으로 한국인 디자이너들은 그 어떠한 회사에서도 가장 경쟁력있는 디자이너들로 꼽히고 있다. 

Q. 중국 자동차들은 지나치게 화려하다는 느낌인데, 볼보에서 추구해온 색깔과는 많이 다르지 않나. 

중국 자동차 브랜드들을 하나의 범주로 묶기에는 어렵다. 마치 유럽의 브랜드를 하나로 묶기 어려운 것과 같다. 이들이 추구하는 가치가 다르고, 목표하는 타겟 역시 다르기 때문에 그에 상응하는 디자인을 추구하고 있다. 과거의 중국 자동차 브랜드 다수가 화려하다고 보여질 수 있는, 개인적으로는 다소 지나친 디자인으로 양산이 이뤄졌다고 생각하지만 이 역시 해를 거듭하며 조금씩 성숙해지고 발전하고 있다. 볼보에서 추구해왔던 디자인적 성숙함은 그대로 유지하고, 새로운 브랜드에 걸맞는 디자인을 추구해나갈 예정이다. 

Q. 그런 점에서 인상깊게 봤던 중국 자동차가 있다면.

개인적으로 리 오토(Li Auto, 理想汽车)의 절제되고 성숙한 디자인을 인상깊게 봤다. 

이정현 디자이너
이정현 디자이너

Q. 새로운 도전을 통해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다면 무엇인가

볼보에서 디자인 매니저로 일할 때에는 총괄의 지휘를 받아 협업으로 좋은 디자인을 도출하고, 이를 양산으로 이끌어가는 일을 했다. 새로운 곳에서는 익스테리어 디자인에 있어 비전을 제시하고, 그에 맞는 디자인을 이끌어내고 나아가며 이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크게 봤을 때 좋은 디자인을 도출해내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브랜드와 트렌드에 맞는 비전을 제시하고, 이를 구체화해 좋은 디자인의 차들을 꾸준히 양산해 브랜드를 발전시켜나가고 성숙시키는 데에 도움이 되도록 하는 게 목표다. 

Q. 디자이너가 되기로 마음먹은 후 계속 지켜오고 있는 가치와 철학이 있다면

디자인적 관점과 디자인 외적인 관점,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좋은 디자인은 화려함으로 장식되어 시선을 끄는 게 아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오랫동안 보고 사용할수록 그 가치를 더하는 것이다. 순간적인 맛과 포만감을 주는 패스트푸드와 처음 맛봤을때의 느낌과 시간이 흘러 익을수록 더 다양하고 깊은 맛을 느낄 수 있는 우리의 김치와의 차이라고 할 수 있겠다. 김치 같은 디자인을 하려고 노력해왔고, 이는 앞으로도 추구하고자 하는 가치와 철학이다. 

디자인 외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디자이너가 되기 전부터 지켜오고자 했던 철학이 있다. '겸손한 자신감(Humble Confidence)'이다. 겸손과 자신감은 상충되는 의미가 있을 수도 있지만, 겸손이 없는 자신감은 자만이 될 수 있고, 자신감이 없는 겸손은 자학이 될 수도 있다. 그렇기에 둘의 균형을 유지하고자 항상 노력해왔고, 앞으로도 이러한 태도와 가치를 유지하고자 한다. 겸손하면서도 자신감 있는 디자이너는 끊임없이 배울 수 있는 자세를 유지하며 좋은 디자인을 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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