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차 딜레마(EV Dilemma)에 빠졌다. 내연기관에서 전기로 바꾸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만 같았던 장밋빛 미래도 잠시, 예상치 못한 문제가 계속 터져나오며 관망세에 접어들었다. 특히, 많은 소비자들이 전기차 구매를 멈추자 전체적인 판매량이 줄어들면서 성장 동력을 잃어가는 모습이다. 

# 생각지 못한 단점, 전기차 딜레마

전기차 딜레마는 크게 5가지가 언급된다.

먼저 '진짜 친환경인가'에 대한 의문이다. 전기차 자체는 매연을 만들지 않지만 생산과정에서 부수적인 공해를 일으킨다. 배터리와 모터에 사용되는 리튬, 코발트, 그리고 최근 대두되고 있는 디스프로슘(dysprosium) 등이 모두 희토류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자연에서 얻지 못하고 가공을 해야하는데 공기 뿐 아니라 주면 산림과 하천까지 오염시키고 있다.  

성능도 문제다. 많은 제조사가 신개발 전기차를 내놓으면서 ‘슈퍼카 버금가는 가속 성능’을 어필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배터리 성능을 깎아내는 주요 요인이다. 강력한 성능은 곧 배터리에 부하를 주고, 열화를 촉진시키기 때문이다.

충전도 해결해야 한다. 최근 출시되는 전기차는 최소 150kW에서 많게는 350kW 이상 초고속 충전이 가능하다. 하지만 고속충전 이용 비중이 높으면 배터리 수명 단축을 앞당긴다. 많은 제조사들은 앞어서는 '초고속 충전'을 내세우면서 뒤로는 '완속 충전'을 권장하는 이유다.

주행거리도 중요한 이슈다. 1회 충전으로 400km대 주행거리를 확보한 전기차들이 많아지고 있다. 하지만 이는 배터리가 100% 충전된 경우다. 완전 충전은 배터리에 나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제조사에서는 80% 충전을 강조한다. 400km 전기차를 구매해도 실제로는 20% 깎인 320km짜리 전기차를 타는 셈이다.

가격과 유지비, 보조금 등 돈도 문제다. 전기차 가격의 40% 이상은 배터리가 차지하기 때문에 가격이 높다. 충전 비용도 갈수록 비싸지고 있다. 전기차 충전 요금은 3년 만에 2배 비싸졌다. 때문에 아직도 국가 보조금 의존도가 매우 높다. CnEV포스트(CnEVPost)에 따르면 올해 1월부터 보조금을 폐지한 중국의 전기차 판매량은 보조금을 지급했던 12월 대비 48.3%나 감소해 사실상 반토막이 났다.

# 문제는 배터리… 하지만 수명 정보는 ‘깜깜깜’

다양한 딜레마를 나열하다 보면 그 중심에는 '배터리'가 있다. 생산부터 운영·관리까지 전기차는 배터리로 시작해 배터리로 끝난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문제는 제조사들이 배터리에 대해 방관하고 있다는 점이다. 성능과 편의장비 등 특장점만 강조할 뿐, 배터리 관리에 대한 설명이나 정보 전달에는 소극적이다.

애플은 아이폰의 배터리 성능을 소비자가 알 수 있게 공개한다
애플은 아이폰의 배터리 성능을 소비자가 알 수 있게 공개한다

일단, 보증기간은 넉넉하게 준다. 많은 전기차 제조사가 적어도 8년/16만km에서 10년/20만km 배터리 보증(선도래 기준)을 해주고 있다. 엔진 변속기와 비교하면 2배 이상이다. 이 기간 동안에는 배터리 성능이 70% 이상 유지된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이 70%라는 수치는 너무 친기업적이라는 지적이다. 1회 충전으로 400km를 달리는 전기차의 배터리가 70%로 줄어들면, 주행거리는 280km로 낮아진다. 특히, 배터리 성능을 조금이라도 유지하기 위해 80%만 충전한다면 면 주행거리는 224km로 떨어진다. 추운 겨울에는 200km를 달리기 힘들 가능성이 높다. 주행거리 걱정 없이 구매한 장거리 전기차가 도심형 전기차로 전락해 버리는 것이다.

때문에 많은 소비자들은 제조사가 보다 적극적으로 배터리 모니터링 서비스를 실시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내 차의 배터리 수명 정보를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으면 극단적인 가감속을 지양하고, 완속 충전 비율을 늘리는 등 긍정적인 방향으로 차량 관리가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 제조사가 배터리 수명 정보 공개를 꺼리는 이유

하지만 제조사는 몇 가지 이유로 구체적인 배터리 수명 정보 공개를 꺼리고 있다. 

기본적으로는 데이터 접근 권한을 제한하기 위함이다. 전기차는 모두 똑같아 보이지만 제조사마다 배터리의 유지 관리 및 운영과 관련된 소프트웨어(Battery Management System, BMS)가 모두 다르다. 같은 배터리와 모터를 사용해도 BMS 차이에 따라 주행거리와 전비, 심지어 동력성능 차이까지 만들 수 있다.

배터리 수명정보는 차량의 사용패턴과 온도 관리, 충전, 배터리의 화학적 성질 등 모든 정보를 BMS가 취합해 만들어야 한다. 소비자에게는 단순히 '배터리 수명 00%'라는 몇 글자를 보여주는 것 같지만, 제조사에게는 사실상 BMS 정보를 공개하라는 것이 되어버린다. 이는 제조사의 노하우를 만천하에 드러내라는 것과 마찬가지로, 마음만 먹으면 그동안 쌓아온 광범위한 노하우를 모두 빼낼 수도 있다는 것이다.

# 소프트웨어에 극히 민감한 테슬라와 자동차 업체들

대표적인건 테슬라다. 테슬라는 현재까지 타사 대비 앞선 소프트웨어 기술력을 확보한 것으로 유명하다. 현대차그룹이 ICT 부문에 세자릿수 채용을 시작한 것도, 폭스바겐그룹이 소프트웨어를 위해 2026년까지 300억 유로(약 40조 원)를 투자하는 것은 단순히 테슬라를 따라하기 위함이 아니다. 소프트웨어가 곧 미래 전기차의 경쟁력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테슬라는 외부에서 소프트웨어에 접근하는 것을 극도로 꺼려한다. 미국과 한국 모두진단정보 제출요청을 거부해왔으며, 심지어 OBD 단자도 없앴다. 소프트웨어 기술 해킹 우려 때문이다.

테슬라 뿐 아니라 모든 자동차 제조사도 전기차의 내부적인 정보에 접근할 수 없도록 막고 있다. 테슬라와 달리 OBD 단자는 있지만 제공하는 정보는 제한적으로 막아놨다. LG에너지솔루션과 같은 배터리 기업은 제조사와 협업하기 때문에 더 많은 정보에 접근할 수 있지만 각종 보안 등을 이유로 소비자 제공용 정보와 기업용 정보를 구분하고 있다.

다른 이유도 있다. 모든 제조사가 배터리 수명정보를 공개하면 그 즉시 비교가 될 것이고, 결국 어떤 업체는 타격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또, 고의적으로 배터리를 열화시켜 부정적인 소문을 퍼트리면, 해당 제조사의 이미지는 한순간에 무너질 수도 있다. 전기차 전환의 시기에 매우 큰 위험으로 꼽힌다.

전기차 판매가 줄어들 우려도 언급됐다. 배터리 수명 정보를 공개하면 소비자들이 이상적으로 차량 관리를 할 가능성이 높고, 그만큼 신차 교체 주기가 길어질 것이라는 주장이다. 제조사에서 판매량 하락 및 매출 감소로 이어질게 뻔한 서비스를 실시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아직 제조사에서는 명확한 대답을 내놓지 않고 있지만, 머지않은 미래에는 강제로 공개해야 할 수도 있다. 이미 유럽을 중심으로 전기차 배터리 진단 서비스를 출시하는 업체가 속속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중고차 업체를 대상으로 배터리 수명 정보 인증 활동을 하며 시세를 확장하고 있다. 

# 미국과 유럽의 배터리 수명 정보 법제화 움직임… 한국은?

소비자 요구에도 불구하고 제조사가 움직이지 않자 정부가 나서기 시작했다. 지난 2021년, 캘리포니아 대기 자원 위원회(CARB)는 2026년부터 판매할 전기차를 대상으로 ‘소비자가 읽을 수 있는 상태 측정 지표(customer readable state of health metric)’를 공개하는 법안을 발의했다. 동시에 15년 혹은 15만마일(약 24만km) 동안 배터리 수명 80%를 유지하도록 보증 범위와 기준도 강화했다.

캘리포니아의 제안은 정식 법안으로 공포되지 않았지만, 미국 정부를 움직이는 데 성공했다. 올해 미국 환경보호청(EPA)은 전기차 제조사를 대상으로 배터리 보증 및 모니터 시스템 장착 요구를 고려한다고 밝혔다.

배터리는 5년 혹은 6만2000마일(약 10만km) 동안 80%, 8년 또는 10만마일(약 16만km)은 70% 이상의 성능을 유지해야 한다. 여기에 제조사는 배터리 모니터를 장착해야 한다. 현재 사용할 수 있는 배터리 수명이 신차 대비 어느 정도인지 백분율로 표기하도록 구체적으로 명시됐다. EPA는 2027년부터 2032년까지 단계적으로 신규 법안을 시행시킬 계획이다.

유럽도 2023년부터 본격적인 전기차 배터리 수명 정보 공개 법안을 추진 중이다. 제로 에미션 사무국(OZEV)은 영국 정부와 유엔 유럽 경제위원회(UNECE)가 공동으로 전기차 배터리 성능 표준 및 모니터 기능에 대한 기술 규정을 개발해 왔다고 밝혔다. 특히 ‘소비자가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을 명확히 했으며, 일정 수준 정확도 요건까지 충족해야 한다고 밝혔다. 영국과 유럽연합 모두 해당 법안을 적용할 예정이며, 이르면 2025년 7월 유로 7과 함께 배터리 모니터가 도입될 예정이다.

반면, 우리나라의 대처는 느리다. 국토교통부의 전기차 관련 법안 발표는 2020년 11월 전기차 배터리 검사기준 및 정비 교육 강화 관련 내용을 담은 ‘자동차관리법 시행규칙 개정안 예고’가 마지막이다. 전기차 배터리를 교체하는 '배터리 스왑(Battery Swap)'에서도 중국은 2006년부터 관련 사업을 추진해 왔지만, 국내는 2022년이 되어서야 규제 개정안을 발표한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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