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틀리 그랜드투어러의 역사는 지난 195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코치빌더였던 H.J 뮬리너의 손길로 탄생한 R-타입 컨티넨탈은 수려한 디자인에 고성능 엔진의 조화로 '컨티넨탈'이라는 차명을 탄생시켰다.

약 70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벤틀리의 컨티넨탈 시리즈는 건재하다. 무엇이 이 차를 이토록 오랫동안 사랑받게 했을까. 직접 느껴보기 위해 컨티넨탈 GT 아주르를 시승했다.

서울 청담동 벤틀리 큐브에서 만난 컨티넨탈 GT 아주르. 잘 숙성된 와인처럼 살짝씩 보이는 붉은빛이 매력적이다.
서울 청담동 벤틀리 큐브에서 만난 컨티넨탈 GT 아주르. 잘 숙성된 와인처럼 살짝씩 보이는 붉은빛이 매력적이다.

사실, 현행 컨티넨탈 GT는 이미 지난 2017년 공개한 오래된 모델이다. 그러나 출시 당시부터 과거 디자인을 오마주했기 때문일까. 7년이 흘렀어도 오래됐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동그란 헤드램프부터 넓적한 그릴까지. 아직도 오히려 낯선 인상이다.

아주르(Azure)는 과거 벤틀리의 최고급 그랜드 투어러에서 그 이름을 따왔다. 고급스러운 분위기와 편안함을 추구하는 모델인데, 자신들의 기준에 맞춰 우아함과 안락함을 갖춘 모델만 아주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다. 컨티넨탈 GT는 전용 크롬 그릴과 22인치 휠로 '우아함'을 챙겼고, 다이아몬드 퀼팅이 적용된 가죽 트림과 통풍 및 마사지 기능이 더해진 시트, 각종 주행 보조 사양으로 '안락함'을 더했다고 한다.

컨티넨탈 GT의 백미. 카메라를 들고 '어떻게 찍어야 풍만한 뒷태를 잘 담아낼 수 있을까' 한참 고민했다.
컨티넨탈 GT의 백미. 카메라를 들고 '어떻게 찍어야 풍만한 뒷태를 잘 담아낼 수 있을까' 한참 고민했다.

대체로 차의 첫인상을 결정짓는 부분은 앞모습이다. 사람의 얼굴과도 같기 때문인데, 컨티넨탈 GT는 옆면이 더 눈에 남는다. 길게 뻗은 후드와 매끄럽게 흐르는 듯 떨어지는 지붕 라인, 그리고 근육질 펜더와 거대한 22인치 휠은 안 어울릴 듯 대조되지만 묘하게 섞여 아름다움을 뽐낸다.

이런 생각은 후측면에서 바라봤을 때 더욱 굳어진다. 2도어 쿠페 특유의 긴 문짝을 비롯해, 한껏 튀어나온 뒷 펜더, 풍만한 엉덩이까지 사람을 매료시킨다.

사실 외모의 각 요소를 뜯어 찬찬히 살펴보면 의외로 복잡하거나 화려하지 않다. 휠 디자인은 무난한 V자형 5포크 디자인이고, 테일램프 역시 내부가 화려하긴 하지만 모양 자체는 타원형으로 단순하다. 배기구도 별다른 장식 없이 타원형이고, 차체를 가로지르는 강렬한 캐릭터라인도 없다. 대신 차체 아래를 관통하는 크롬 라인을 하나 그어놨을 뿐이다. 단순한 요소 여러 개를 어우러지게, 그리고 복잡하지 않게 배치했는데 오히려 '여백의 미'가 돋보인다.

빨간 가죽과 크롬으로 화려하게 장식한 실내. 눈에 보이는 곳, 손에 닿는 곳 모두 부드러운 가죽으로 마감해 호화롭고 사치스럽다. 
빨간 가죽과 크롬으로 화려하게 장식한 실내. 눈에 보이는 곳, 손에 닿는 곳 모두 부드러운 가죽으로 마감해 호화롭고 사치스럽다. 

실내도 아주 호화스럽다. 시승차는 외모와 결을 맞춘 강렬한 빨간 가죽이 무난한 베이지색 가죽과 잘 어우러진다. 여기에 플라스틱보다 더 매끈하게 반짝거리는 검정색 나무 장식 '피아노 블랙 베니어'와 곳곳을 화려하게 장식하는 크롬이 고급스러움을 한껏 끌어올린다.

가죽과 크롬이 전통적인 고급스러움을 강조한다면, 디지털 클러스터와 센터 디스플레이는 보다 현대적인 고급스러움을 표현한다. 계기판은 럭셔리카답게 전통적인 두 개의 원형 다이얼로 표현하지만, 둘 사이를 벌려놓아 다양한 정보를 표시할 공간을 충분히 마련했고, 보기 좋게 알려주고 있다. 센터 디스플레이는 회전식으로, 시동이 꺼져 있을 때는 나침반과 크로노그래프가 나타난다. 물론 주행 중 버튼을 통해 화면을 가릴 수도 있다.

타고 내리는 불편함만 감수하면 의외로 앉아있을 만한 컨티넨탈 GT의 2열.
타고 내리는 불편함만 감수하면 의외로 앉아있을 만한 컨티넨탈 GT의 2열.

2열도 생각보다는 앉을 만했다. 183cm 성인 남성인 본인 기준, 타고 내릴 때 많은 노력이 필요하긴 하나 한 번 몸을 구겨넣으면 안락하게 앉아있을 수 있다. 무릎과 머리 공간도 마지노선처럼 딱 들어 맞는다. 좁긴 하지만 앞쪽과 마찬가지로 화려한 퀼팅 패턴의 가죽으로 둘러싸여 있고, 양 옆에 엠비언트 라이트까지 있어 운전자와 호화로움을 공유할 수도 있다. 

오랜만에 만난 8기통 엔진. 수치만 보면 분명 부담스러워야 하는데 의외로 운전자와 보조를 잘 맞춰준다.
오랜만에 만난 8기통 엔진. 수치만 보면 분명 부담스러워야 하는데 의외로 운전자와 보조를 잘 맞춰준다.

운전석에 앉아 시동 버튼을 누르자 고양이과의 맹수가 그르렁거리는 소리를 내듯 엔진이 깨어난다. 컨티넨탈 GT는 4.0L V8 트윈터보 엔진과 8단 DCT의 조합으로 최고출력 550마력, 최대토크 78.5kgf·m를 발휘한다. 수치만으로는 운전자를 압도하기에 충분하지만, 막상 운전대를 잡아보면 그다지 어렵지 않게 다룰 수 있다.

가속 페달에 슬며시 발을 얹어보면, 발톱을 숨긴 채 부드럽게 앞으로 나아간다. 3챔버 에어 서스펜션이 기본으로 탑재되기 때문에 노면이 정돈되지 않은 주차장에서도 마치 요트처럼 출렁이며 앞으로 나아간다. 그랜드 투어러(Grand Tourer, GT)라는 이름값에 걸맞게 편안하다. 

속도를 높이니 이런 특성은 더욱 명확해진다. 여전히 엔진은 운전자의 심기를 살피듯 나긋나긋하게 반응하고, 서스펜션은 거친 노면과 포트홀을 부지런히 걸러낸다. 그러나 주행 모드를 스포츠로 바꾸면 차의 성격이 완전히 바뀐다.

클래식한 외모가 한껏 진중함을 뽐내고 있지만, 가만히 서 있어도 휘날리는 듯한 루프라인 덕분에 역동적임이 느껴진다.
클래식한 외모가 한껏 진중함을 뽐내고 있지만, 가만히 서 있어도 휘날리는 듯한 루프라인 덕분에 역동적임이 느껴진다.

앞에서는 변속기 단수가 낮아지고 RPM이 높아지며 8기통 특유의 둥둥거리는 엔진음이 고조되고, 뒤에서는 배기 플립이 열려 거센소리가 들려온다. 스포츠 배기가 탑재된 S 모델이 아닌데도 확 돌변했다는 점이 느껴질 정도다. 방금 전까지 출렁이던 서스펜션은 노면을 꽉 움켜쥔 듯 단단해지고, 스티어링 휠은 손바닥에 땀이 날 정도로 묵직해진다. 이 상태로 산길에 들어섰다.

사실 코너링 성능은 기대하지 않았다. 2도어 쿠페이긴 하지만, 이름부터가 '그랜드 투어러'이고 주행 성능보다 고급스러움을 강조한 자동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날 시승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점은 코너링 시 몸놀림이다. 고급스럽고 유려한 외모, 그리고 'GT'라는 이름에서 오는 편견과는 달리 제법 날카로운 코너링 성능을 갖추고 있다. 와인딩 코스에서 2.5톤에 달하는 육중한 차체를 이리저리 내던져봐도 잘 견뎌낸다. 315mm에 달하는 넓적한 뒷바퀴 덕분에 쉽사리 미끄러지지도 않는다. 

동그란 헤드램프와 커다란 격자무늬 그릴까지 이미 오랫동안 봐온 디자인이지만 여전히 낯설고 아름답다.
동그란 헤드램프와 커다란 격자무늬 그릴까지 이미 오랫동안 봐온 디자인이지만 여전히 낯설고 아름답다.

특히, 전자식 액티브 롤링 컨트롤 시스템인 '벤틀리 다이내믹 라이드'가 작동한다는 것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 차가 돌아나갈 때 스스로 스태빌라이저를 제어해 반대쪽 차체를 들어줘 쏠림을 막아주는 기능인데, 운전대를 감을 때마다 몸은 이리저리 마구 쏠리는데 자동차는 별일 아니라는 듯 평온함을 유지해 어색할 정도다. 

짧지만 강렬했던 산길 주행을 마치고 다시금 평지로 돌아왔다. 주행 모드는 다시 '벤틀리 모드'로 설정하고, 얼마 남지 않은 목적지까지 여유로운 주행에 나섰다. 지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음악도 틀어봤다.

자극적이지 않아 더 좋았던 네임 오디오 시스템.
자극적이지 않아 더 좋았던 네임 오디오 시스템.

컨티넨탈 GT에는 영국의 하이엔드 오디오 브랜드인 네임(Naim)사의 오디오 시스템이 탑재된다. 총 18개의 스피커가 2200W 출력을 내는데, 느낌이 독특하다. 그간 여러 브랜드의 오디오를 들어봤는데, 하이엔드급일수록 명료하고 강렬한 소리를 내지만, 자극적이라 오래 듣기 어려운 경우가 많았다.

네임 오디오 시스템은 처음 들었을 때는 다소 심심한 느낌이다. 하지만, 길게 자세히 듣다 보면 보컬과 악기의 분리가 명확하게 느껴져 듣는 맛이 있다. 전반적인 음색은 마치 진공관 앰프처럼 따뜻하다. 장거리를 편하게 이동하는 'GT'의 이름값에 더욱 적합한 느낌이다. 

컨티네탈 GT는 'GT'라는 이름이 붙은 자동차 중 GT의 성격을 가장 잘 이해한 자동차가 아닐까.
컨티네탈 GT는 'GT'라는 이름이 붙은 자동차 중 GT의 성격을 가장 잘 이해한 자동차가 아닐까.

온종일 느껴본 벤틀리 컨티넨탈 GT는 'GT'라는 이름값에 충실하면서도, 운전자가 원할 때는 보폭을 맞춰 달려주는 맛이 있었다. 1952년부터 그랜드 투어러를 만들어온 벤틀리답게 럭셔리와 퍼포먼스라는 결코 어울릴 것 같지 않던 두 가지를 잘 버무려놨다. 말이 안 되는 것을 가능케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사람들이 초호화 럭셔리카를 구매하는 이유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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